현조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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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충작(忠綽) 1521∼1578 [오산군방]
자는 군정(君貞), 호는 졸암(拙菴)·낙빈(洛濱). 대군의 4대손이며 당은군(唐恩君)의 아들이다. 1559년(명종 14) 정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혔으며, 1562년(명종 17) 학문이 해박하고 품행이 뛰어나 형조좌랑에 특진되었다. 또 공조·예조·병조를 두루 거치고 사헌부 지평·장령·지제교·사성·사섬시정·사간 등을 역임하고, 승정원 승지에 올랐으며 외직으로 여주목사·전주부윤·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공은 마음을 맑게 하여 모든 일을 살펴서 모두 공의 덕을 송덕했다. 공은 모친 상을 당하여 묘지기하며 통곡하다가 눈이 하나 멀기까지 했다. 시에 능했고 저서도 많다.
5세 진( 瑱) 1553∼1631 [정양군방]
초휘는 수(璲), 자는 경유(景瑜). 대군의 4대손이며 진천군의 차남이다. 1580년(선조 13)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부장이 되고, 1592년(선조 25) 함종현령이 되었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순찰사 리원익(李元翼)의 휘하로서 부산원(斧山院)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이듬해 정월 이여송의 평양 수복전에 참가하여 평안도 별장이 되었다. 1595년(선조 28) 평안도 순찰사 윤승길(尹承吉)의 휘하에서 진관속오군(鎭管束伍軍) 편성과 훈련의 책임을 맡아보았다. 그 공으로 온성부사로 임명되어 임기를 마치고 회령부사가 되어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 왕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603년(선조 36) 임진왜란의 논공행상 때 선무원종공신으로 책록되고, 1606년(선조 39) 회령부사·영흥부사·순천부사를 두루 거쳐 훈련도정에 올랐다. 1609년(광해군 1)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그 다음해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전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칠서지옥(七庶之獄) 사건에 연좌되어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영사원종공신에 책록되어 훈련대장에 발탁되고, 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1628년(인조 6) 중추부사로 함경도 절도사를 겸하여 북방 경비에 많은 공을 세웠다. 1631년(인조 9) 향년 79세로 별세했다. 인조대왕은 부음을 듣고 애도하여 예조좌랑 김수익(金壽翼)을 보내어 `명문의 가계에서 태어나 무관으로 발신하여 여러 고을의 재상을 지내고 백성을 지성으로 사랑하였다. 오위의 장관이 되어 위풍이 늠름하였고 나이가 70이 넘어 작위가 2품에 이르렀도다. 근력이 쇠잔하지 않고 기운이 장사보다 더하니 위품이 있으며 나라의 노장이라 할 만하다. 도적을 잡는 것을 직책으로 하니 간사한 자들의 종적이 없어졌고, 내 일찍이 이를 가상히 여겨 왔는데 경이 홀연히 세상을 떠났도다. 선조의 무신이 다 저 세상으로 가고 나라가 적막하니 누구를 간성으로 삼을꼬? 조정에 임하니 탄식을 하게 되고 북소리를 들으니 비감한 생각이 드는도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5세 몽서(夢瑞) 1540∼1621 [영양군방]
자는 중길(中吉), 대군의 현손이며 운양도정 원(元)의 아들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용모가 남달리 빼어났으며 의기가 활달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생원이 되고 이어 사직참봉으로 임진왜란 때 공이 있어 선무훈(宣武勳)의 녹을 받았다.
5세 몽상(夢祥) 1539(중종 34)∼1605(선조 38) [영양군방]
자는 경휴(景休), 호는 저당(樗堂). 대군의 현손이며 풍양도정(豊陽都正) 춘(春)의 아들이다. 1560년(명종 15) 무과에 올라 겸인의(兼引儀)에 배수되었다. 이어 남양감목관,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임실현감에 임명되었으며 정사를 보살핌이 자상하여 아전과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 1592년(선조 52) 4월 왜구가 대거 창궐하여 호남과 영남이 적에게 유린당하였다. 이때 공은 군대를 거느리고 순찰사 이광(李洸)의 막하에서 싸웠으나 여러번 패하였다. 이에 임지인 임실로 돌아와 방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충의로써 고을 사람을 격려하여 편안하게 하였다. 1593년(선조 26) 세자가 남쪽 지방에서 군사를 위로하고 수령들의 현명함을 살폈는데, 순찰사가 공의 치적을 첫번째로 보고하여 특별히 옷감을 내려 포상하였다. 1598년(선조 31) 군자감 판관 겸 익위사 사어에 임명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 향년 67세로 별세하였다. 아들 관찰공(觀察公)의 추은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과천현 장이동 선영에 장사지냈다. 그 뒤 수도 서울의 확장으로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신대리 산1번지로 이장하였다.
5세 추(樞) 1576∼1637 [영양군방]
자는 군실(君實), 대군의 현손이며 하산도정(河山都正)의 아들이다. 일찍이 수의부위를 지내고 병자호란 때 창신교위의 신분으로 참전했다가 강화도 마니산에서 순절했다. 통정대부로 추증되었다.
5세 의수(義壽) 1559∼1593 [영양군방]
자는 자화(子華), 호는 퇴우당(退憂堂). 대군의 4대손이며 금산령(錦山令) 양(良)의 아들이다. 부사과에 임명되고 광흥수(廣興守)로 종부시정을 하였으며, 1592년(선조 25) 음직으로 승지에 임명되고 임진왜란 때에 남포에서 창의하여 적군과 싸우다 이듬해 진주에서 순절하였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이 사실이 <충훈록>에 기록되어 있다.
5세 예수(禮壽) 1562∼ ? [영양군방]
대군의 4대손이며 금산령 양의 아들이고 의수의 동생이다. 무과에 올라 임진왜란 때 남포에서 왜병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참판에 추증되었고, 이 사실이 <부평읍지>에 실려 있다.
5세 신수(神壽) 1573∼ ? [영양군방]
금산령(錦山令) 양(良)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두 형과 함께 임진왜란 중 전사했다.
5세 서룡(瑞龍) 1570∼ ? [영양군방]
대군의 4대손이며 추산부령(秋山副令) 양(讓)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 1606년(선조 39)에 대정현감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던 중 종제 사룡·성룡과 함께 홍수로 인해 별세했다. 그 해 5월 본가에서 알아보니 섬의 암석에 `종제 두 사람과 일행 30여 명이 표류하다가 이곳에서 양식이 다하여 죽는다.'고 씌어져 있었다.
5세 몽룡(夢龍) 1571∼1634 [영양군방]
자는 응견(應見), 호는 운곡(雲谷). 홍산군(洪山君) 득(得)의 아들로서 음직으로 전부(典簿)를 지냈고 학행과 문장이 뛰어났다. 1608년(선조 41) 부친상을 당한 뒤로부터 나라의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세 시백(時白) 1571∼1649 [영양군방]
자는 군실(君實), 호는 수우(守愚). 대군의 4대손이며 한음군(漢陰君) 현(俔)의 아들이다. 공은 원래 천성이 효성스러워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병들자 팔을 찔러 피를 내어 입에 넣고 아버지의 병을 대신하고자 기도를 드렸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처음에는 세마에 배수되고 여러 차례 주현을 맡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와 연루되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폐모에 관한 청정에도 불참하여 부친 한음군과 함께 삭출당했다. 1630년(인조 8)에 영동현감에 제수되고 종친부 전부(典簿)에 배수되었다. 1649년(인조 27)에 병으로 별세하니 향년 79세이다.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5세 원정(元禎) 1538~1590 [영양군방]
자는 선장(善長), 대군의 현손이며 담양령(潭陽令) 충(忠)의 아들이다. 학행과 덕망으로 통정대부 사헌부 장령에 올랐다.
6세 견철(堅鐵) 1572∼1629 [오산군방]
자는 자강(子剛), 충청감사 충작의 장남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進士)에 합격했으나 인천에서 은거하다 인조반정 후 음사(陰士)로 경기 수운판관 후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가 되었다.
6세 정신(廷臣) 1559∼1627 [영양군방]
자는 공보(公輔), 호는 역암(?庵) 또는 졸옹(拙翁). 군자감 판관 몽상(夢祥)의 아들이다. 나이 15세에 이미 사서에 통달하고 1579년(선조 12)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반궁(泮宮)에 있으면서 경학에 전념하고 1588년(선조 21) 봄에 문과에 올라 부정자(副正字)에 배수되고 이듬해에 승정원 주서, 1591년(선조 24)에 호조좌랑·의정부 검상·사인에 전보되었다. 또 이듬해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 25)에 예조좌랑과 병조정랑을 지냈다. 4월에 왜적이 쳐들어와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갈 때 사간원 헌납으로서 호종하였으며, 적군이 물러나자 임금을 받들어 서울로 돌아와 그 길로 호남에 내려갔다.  1594년(선조 27)에 김제군수를 제수받고, 1596년(선조 29) 순찰사 홍세공(洪世公)과 도원수 권율이 연이어 그 치적을 아뢰었으므로 이해 겨울 광주목사로 발탁되었다. 1597년(선조 30) 가을에 왜적이 남원을 함락시키고 이웃 고을을 핍박하기에 이르렀다. 공이 홀로 고을 안의 백성과 더불어 향병을 모집하고 계책을 세워 거의 보름 동안 방비하였다. 적병이 야습하여 성밑에 접근하니 공은 잠시 숨어서 이를 피하였으며 적은 안을 엿보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모두 물러갔다. 이에 즉시 고을로 돌아와 아전과 백성을 모아 수습하였으니 이런 까닭에 호남이 병화를 입은 뒤에도 광주가 맨 먼저 복구되었다.  이듬해 순찰사 황신(黃愼)이 사유를 갖추어 아룀으로써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때에 명나라 군사가 순천에 오랫동안 주둔하여 적과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군량이 궁핍해지자 공은 광주에 축적된 곡식 수백석을 운반하여 군량을 조달했다. 호조참의 이민각(李民覺)이 또한 장계를 올리자 임금은 특별히 공에게 표리(表裏) 한벌을 하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주부윤에 임명되었는데 떠나가는 날에 광주의 백성들이 모두 길을 막고 눈물을 흘렸으며 업적을 기록한 비를 세웠다. 명나라 군사가 돌아가는 길에 전주에서 오래 머물자 끝까지 접대하였으므로 임금은 어구의 말을 내려 은총을 베풀었다.  1601년(선조 34) 동부승지에 이어서 나주목사에 임명되어 한달이 채 안돼 치적이 널리 알려졌다. 이듬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무덤 옆에 초가를 짓고 한결같이 법도를 따랐으며 1604년(선조 37)에 복상을 마치자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부친상과 같이 복상을 마치자 1608년(선조 41) 안동대도호부사에 배수되고 1609년(광해군 1) 동지중추부사·의주부윤, 이어서 충청도 관찰사로 옮겼다. 1615년(광해군 7) 사은부사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 복명한 뒤 가의대부의 위계에 올랐다. 1617년(광해군 9) 죽산부사, 1620년(광해군 12) 한성부 우윤, 이어 좌윤에 찬리사가 되어 황해도·평안도에서 군무를 보살피고 계해정사가 있은 뒤에 중추부와 비변사 당상 및 경연특진관을 겸하였다. 이 해 9월에 경주부윤에 임명되고 1627년(인조 5)에 여진 오랑캐가 관서를 계속 함락하고 해서에 육박하자 임금이 서울을 떠나 강화도로 들어갔다. 이때 공이 호종하고 4월에 다시 호가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이 해 11월에 원주목사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며칠 안되어 12월 20일 향년 69세로 임지에서 생애를 마쳤다. 1627년(인조 5) 이듬해 2월 과천 장의동 선영에서 장사지냈다. 뒤에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신대리에 이장하였다.
6세 응원(應元) 1594∼1633 [영양군방]
자는 인중(仁仲), 호는 사우재(四友齋). 종부시정 겸 승지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수(義壽)의 아들이다. 음사로 통정대부 사재감정을 지냈고 사헌부 사성에 추증되었다.
6세 정익(廷翼) 1571∼1597 [영양군방]
자는 군익(君翊), 호는 죽와(竹窩). 대군의 5대손이며 진사 몽경(夢慶)의 아들이다. 공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었으며 큰 기질과 지략이 뛰어났다. 1597년(선조 30)에 왜구가 재침하여 왔을 때 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왜적의 후방이 끊이지 않으니 공이 의리에 격동하고 분발하여 울면서 백씨 정직(廷直)에게 부모의 봉양을 의탁하며 “다행히도 형제가 있으니 하나는 부모를 위할 것이며 하나는 나라를 위하면 이것이 충효에 두 가지를 온전히 하는 것이다.”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조봉대부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으니 이 사실이 <호남절의록>과 <봉성읍지>에 실려 있다. 석주관 옛 전쟁터에 사우를 짓고 단을 쌓아 매년 제향을 올린다. 행적기와 시 한편이 남아 있다.
6세 정수(廷秀) 1610∼1690 [영양군방]
자는 고실(苦實), 대군의 5대손이며 하산도정의 손자로 추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이후 과거 공부를 폐하고 호를 부심자(腐心子)라 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침랑(寢郞) 능참봉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7세 만영(晩榮) 1604∼1672 [오산군방]
자는 장춘(長春), 호는 설해(雪海). 충작의 손자이다. 1635년(인조 13) 알성문과에 급제, 그 해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장령·사간·청주목사를 지냈다. 1651년(효종 2) 집의(執義)로 진향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3년(효종 4) 사간이 되고, 이어 보덕(輔德)·강원관찰사 등을 거쳐 1670년(현종 11) 대사간을 지냈다. 이듬해 사은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예조참판에 전임됐다. 1672년(현종 13)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임지에서 별세했다. 공은 “학문이란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버리고 부질없이 성명을 논한들 무슨 보탬이 있으랴.”고 했다. 한가롭게 집에 있을 때는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경사(經史)를 공부했다. 또한 <근사록>과 <심경(心鏡)>을 좋아하여 손에서 놓지 않았다.
7세 만창(晩昌) 1597∼1659 [오산군방]
대군의 6대손으로 견봉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호가하여 1628년(인조 6) 영사훈(寧社勳)을 받았다.  묘소는 회덕 북면 방촌(芳村) 오좌에 있다.  배위는 숙인 남양홍씨이며 묘는 쌍봉이다. 2남을 두었다.
7세 만길(晩吉) 1607∼1667 [오산군방]
자는 경장(慶長), 호는 취은(醉隱). 견철(堅鐵)의 아들이다. 1648년(인조 26) 정시 병과에 급제하여 사예(司藝) 등 청환(淸宦)을 지내고, 강원도 관찰사에 올랐다.  배위는 충주최씨 광형(光炯)의 딸이다.  묘소는 충남 태안군 태안읍 장산리에 있다.
7세 응명(應蓂) 1581∼1629 [영양군방]
자는 요서(堯瑞), 감사 정신(廷臣)의 아들이다.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웠으며 재예에 출중하여 약관에도 문사로 명성을 날렸다.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묵죽을 잘 그렸다. 1593년(선조 26) 박사제자로 뽑혔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인조반정 때에는 함창현감이 되었다. 다스림이 청빈하여 인조대왕이 옷감 한벌을 내려 포상하였다. 1627년(인조 5) 부친상을 당하자 장사를 지내고 여묘(廬墓)하던 중 복상을 마치지 못하고 향년 49세로 생애를 마쳤다.
7세 응유(應甹) 1584∼1653 [영양군방]
자는 중무(仲茂), 호는 귀의당(歸依堂). 정현(廷賢)의 아들로 선무랑에 올랐으며 병자호란에 조행립(曺行立)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7세 응협(應莢) 1588∼1641 [영양군방]
자는 성서(聖瑞), 감사 정신(廷臣)의 아들이며 배위는 홍문관 직제학 김대래(金大來)의 딸이다. 1623년(인조 1) 장흥고(長興庫)의 주부에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사헌부 감찰에 오르고, 1626년(인조 4) 연천현감에 이어 지평현령에 임명되었다. 1631년(인조 9) 괴산군수에 임명되고, 1641년(인조 19) 봄에 병으로 사임하고 돌아와 6월 22일에 향년 54세로 별세하였다.
7세 세림(世霖) 1634∼1702 [영양군방]
자는 택부(澤夫), 좌승지 정랑의 아들이다. 음사로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관에 제수되었다.
7세 응시(應蓍) 1594∼1660 [영양군방]
자는 군서(君瑞), 호는 취죽헌(翠竹軒) 또는 죽창(竹窓). 감사 정신(廷臣)의 아들이다. 1615년(광해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0년(인조 8) 예빈시 별제에 보직되었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에 선발되고 이듬해 봄에 전적에 오르고 찬수청의 직임을 겸하였다. 1636년(인조 14) 봄에 연서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했다. 병자호란 때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이 부체찰사로 발탁하여 종사로 삼자 병을 무릅쓰고 빈청에 나아갔다. 여러 사람들이 “질병이 이 같으니 일을 맡는 것이 불가하다. 뒤에 떨어져서 병을 다스림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공은 “신하가 되어 이 같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의리상 집에 누워 있을 수 없다.”며 호가하였다. 정월에 형조좌랑에 임명되고 2월에 대가를 따라 환도하여 전라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8년(인조 16) 봄 병조정랑에 배수되고 이어서 안악군수로 전보되었다.  1641년(인조 19)에 병으로 벼슬을 내놓고 떠나게 되자 읍민이 길을 막고 머물기를 빌었으며 비를 세우고 덕을 기렸다. 1642년(인조 20) 가을에 성균관 정4품 사예가 되었다. 1643년(인조 21) 봄에 사헌부 장령에 배수되고 가을에 순천부사가 되었다. 1644년(인조 22) 겨울에 고을 사람들이 비를 세워 덕을 기리고 팔마비(八馬碑)도 세워 찬미하였다. 1645년(인조 23) 여름에 군기시정에 임명되고 이어 동지사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가 이듬해 봄에 돌아왔다. 장령에 배수되어 재변(災變)을 반대하다가 유배된 리경여(李敬輿)·심로(沈魯)·홍무적(洪茂績)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1646년(인조 24)에 또 상소를 올려 강빈(姜嬪)의 원옥사(寃獄事)의 사사사건(賜死事件)을 극언하여 “혁혁한 주씨의 왕도는 포사가 근심스러웠고 우리 나라 300년 사직은 조숙원이 멸망시킬 것입니다. 포사는 주나라를 멸명시켰고, 여희는 진나라를 어지럽혔으며 명왕은 아내의 말을 잘 듣다가 졸지에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성인도 이를 경계로 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신이 전하께 어찌 능히 지나치게 염려하실 것 없다고 하오리까? 항시 전하께서는 정양(靜養) 조섭(調攝) 중에 계시어 절제의 도를 마땅히 하고 여색을 멀리 하는 데 힘쓰셔야 합니다.”고 하였다. 임금은 크게 노하여 변경에 귀양보낼 것을 명하니 삼공과 양사가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결국 겨울에 유배되었다. 1649년 5월 효종이 즉위하자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석방토록 소를 올려 진정하자 임금은 직산에 이양하도록 명하였다. 이듬해 유배지에서 풀려나 가을에 의정부 검사에 제수되었다. 1651년(효종 2) 사간원 사간, 세자시강원 필선으로 옮겼다가 부묘도감 낭청에 차출되고 홍문관 교리·사인을 거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다. 1652년(효종 3)에 성균관 대사성·도승지와 예문관 직제학, 이어서 병조참판과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다. 1653년(효종 4) 함경도 관찰사에 배수되어 어그러진 풍속을 변화시키자 임금은 칭찬하고 표리(表裏)와 구마(?馬)로 상을 내리고 도민은 비를 세웠다.  1657년(효종 8) 봄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전 관찰사의 잉임(仍任)으로 형조참판에 배수되었다. 3월에 판결사 겸 부총관·종부시 제조에 배수되었다. 이듬해 봄에 사은부사에 차출되어 중국 연경에 갔다가 가을에 돌아왔다. 겨울에 대사간에 이어 의금부의 동지사·비변사의 유사당상관을 겸하였다. 곧바로 대사헌에 임명되어 김홍욱(金弘郁)의 원통한 죽음을 신구(伸救)하였다. 이듬해 호조참판에 임명되어 부총관과 관상감 제조를 겸임하고 또 대사헌도 겸임하였다. 5월에 효종대왕이 승하하자 도승지 겸 사역원 제조로 옮겼으며, 한성부 좌우윤 겸 승문원 제조를 겸하고 가의대부에 올라 예조참판에 배수되었다. 1660년(현종 1)에 이조참판으로 옮겼으며 가을 감시와 회시의 시관으로 복무하였다.  1660년(헌종 1) 11월 22일 생애를 마쳤으니 향년 67세이다. 부음을 듣고 임금은 관리를 파견하여 예에 따라 조의를 표했다. 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을 추증하였다. 이듬해 봄 2월 22일 과천 장의동 건금산 선영하에 장사지냈다. 서울 도시확장에 의하여 부득이 경기도 수원시 이의동으로 이장하였다.
8세 이정(以鼎) 1624∼1694 [오산군방]
만창의 아들이며 1664년(현종 5) 병절교위(秉節校尉)에 올랐다. 후에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전의이씨이다.  묘는 능동(陵洞) 유좌에 있으며 쌍봉이다.
8세 상융(尙隆) 1588∼1653 [영양군방]
자는 성백(成伯), 목사 정현(廷顯)의 아들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양주목사를 역임했다
8세 형징(亨徵) 1598∼1662 [영양군방]
자는 사길(士吉), 감사 정신의 손자이며 함창현감 응명의 아들이다. 통덕랑이 되고 병자호란 때 백의로 호종하여 진무훈에 기록되었다.
8세 현징(賢徵) 1599∼1636 [영양군방]
자는 사선(士善), 함창현감 응명의 아들로 성품이 효성스럽고 성실하였으며 문사는 옛사람의 기풍을 따랐다. 나이 약관에 여러번 향시에서 장원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요절하였다.
8세 의징(義徵) 1643∼1695 [영양군방]
자는 대숙(大叔), 대군의 7대손이며 이조판서 응시의 아들이다. 1676년(숙종 2) 음직으로 진안현감에 배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681년(숙종 7) 암행어사 오도일(吳道一)의 추천으로 양리(良吏)로 선발되어 임금이 포장하였다. 이어 남원부사로 전임하여서는 가뭄이 들면 농사를 못짓는 오수방에 보를 막아 농사를 짓게 하여 그곳 사람들이 감복하여 공덕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남원 오수방에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웠다.  이어 내직으로 승차하여 1689년(숙종 15) 호조참의에 이어 충청도 관찰사, 곧 이어 수원부사를 배수받았다. 다음 해인 1690년(숙종 16) 어영대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3월 호조참판에 배수되었다. 1691년(숙종 17)에 공조판서에 특진되고 훈련대장을 겸임하였다. 이듬해 형조판서 겸 훈련대장에, 같은 해 7월 한성부판윤에 배수되고 훈련대장을 겸임하였다. 또한 임금은 갑주와 궁시를 하사하였다. 1693년(숙종 19) 9월 또 다시 형조판서를 제수받고, 같은 해 10월 다시 훈련대장이 되어 왕명으로 통진 문수산 일대를 답사하고 축성의 필요성을 진언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11월에 지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  1694년(숙종 20) 3월 장희빈과 장희재(張希載) 등이 밀모하여 폐비 민씨와 최숙원을 시해음모한다는 고변상소가 올라와 갑술옥사가 일어났다. 남인의 영수 민암(閔?)을 비롯하여 모든 당상관이 유배되니, 공도 관직에서 물러나 거제현에 유배되었다. 새로 등장한 의정부와 간원에서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임금은 번번히 허락하지 않았다. 대간의 끈질긴 탄핵으로 1695년(숙종 21) 정월 22일에 사약을 받고, 향년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08년(순종 2) 3월 억울한 죄가 신원되고 복작되었다.
8세 운징(雲徵) 1645∼1717 [영양군방]
자는 백우(伯雨), 호는 만연(曼衍). 이조판서 응시의 아들이며 지돈녕부사 의징의 동생이다. 음직으로 1677년(숙종 3) 참봉이 되고 1678년(숙종 4) 전설사 별검에, 이듬해 특명으로 평안도 도사에 임명되었다. 1689년(숙종 15) 종친부 전부에 이어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고 7월 성천부사에 임명되었다. 1690년(숙종 16)에 다시 장령, 이어 집의로 승차되고 1691년(숙종 17) 6월 승정원 동부승지에 배수되고 1692년(숙종 18) 가선대부의 위계에 올라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1694년(숙종 20) 전라도 관찰사로 전보되어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술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태천으로 유배되었다. 1710년(숙종 36) 2월에 특별히 방면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1717년(숙종 43) 관작이 복작되고 병으로 별세했다. 임금이 듣고 특명으로 조문과 부의의 은총을 내렸다. 공은 특히 문예에 명성이 있어서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8세 석징(碩徵) 1647∼1710 [영양군방]
자는 대이(大而), 호는 송당(松堂). 대군의 7대손이며 이조판서 응시의 아들이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재질이 뛰어났다. 음사로 옥천군수 겸 청주진관병마절도사에 임명되고 이어 통정대부에 올라 황주목사를 지냈다.
8세 수징(壽徵) 1650~1710 [영양군방]
자는 원경(元卿), 사복시정 정량의 손자이며 동규(東葵)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라 오위장을 지냈다.
8세 필(苾) 1659∼1746 [영양군방]
자는 여휴(汝休), 증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세림(世霖)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무의 재능이 뛰어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1683년(숙종 9) 무과에 급제하여 옹진군수가 되었다. 1746년(영조 22) 가선대부의 위계에 올랐다.
9세 혜주(惠疇) 1644∼1710 [오산군방]
자는 자순(子順), 대군의 8대손이자 평안감사 만영(晩榮)의 손자이다.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했다. 1686년(숙종 12) 절충장군, 1687년(숙종 13) 훈련도위, 1696년(숙종 22) 진위현령, 1702년(숙종 28) 가선대부 행 강계도호부사, 1706년(숙종 32) 전라도 병마절도사·포도대장을 역임했다.
9세 홍유(弘猷) 1614∼ ? [영양군방]
자는 중가(仲嘉), 대군의 6대손이며 형징의 아들이다. 1639년(인조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평택·용담·안협·임실현감을 역임하였다. 통정대부에 올랐다.
9세 홍필(弘弼) 1623∼1688 [영양군방]
자는 여량(汝良), 형징의 아들이며 홍유의 동생이다. 무과에 합격하고 수사를 역임하였다.
9세 홍적(弘勣) 1636∼1711 [영양군방]
자는 사희(士熙), 형징의 아들이고 홍유의 동생이다. 무과에 올라 금천군수·홍주영장 등을 거쳐 부산첨사를 지냈다.
9세 우춘(遇春) 1677∼1757 [영양군방]
자는 취경(就卿), 호는 송월당(松月堂). 증 병조참판 시창(時菖)의 아들이다. 1717년(숙종 43) 무과에 올라 선전관에 임명되고 전출되어 내자시 주부에 봉해졌다. 절충장군에 올라 구례·운봉 두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 이르는 곳 마다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1728년(영조 4) 선전관으로 양무원종훈에 책록되고 가선대부에 올라 호조참판에 제수되었다.
10세 민좌(敏佐) 1640∼1714 [영양군방]
자는 달경(達卿), 호는 강제당(康濟堂). 통덕랑 홍벽(弘璧)의 아들이다. 공은 문학에 달통하고 문장을 바르게 쓰는 것을 중시하였으며, 벼슬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690년(숙종 16) 경기전 참봉에 임명되었다. 이때 공은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어버이의 강권으로 서울에 올라가 사은하고 돌아왔다. 아버지 석담공(石潭公)의 상을 당하여 예법에 따라 복상했다. 복상 후 장원서 별검에 임명되고, 1696년(숙종 22) 의금부 도사에 올랐으나 곧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글 짓는 재주가 뛰어나 붓을 들면 바로 문장을 이루었다. 금석문을 쓴 것이 많다.
10세 요팔(堯八) 1688∼1772 [영양군방]
자는 원보(元甫), 호는 병암(竝菴). 홍망(弘望)의 아들이다. 학행으로 목릉참봉에 임명되었다. 임금은 “나이가 몇이냐?”고 묻고 그 사람됨을 기꺼워하며 <맹자구해(孟子具解)> 1부를 하사하였다. 1711년(숙종 37) 봉사로 전보되고 별제를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10세 일범(一范) 1700∼1756 [영양군방]
자는 만갑(萬甲), 호는 괴암(槐岩). 호조참판 우춘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라 진해현감에 임명되고 이어 서천군수를 지냈다.  덕조(德祖) [1702(숙종 28)∼1777(정조 1)]  자는 윤보(潤甫), 통덕랑 경관(慶觀)의 아들이다. 1735년(영조 11) 무과에 올라 도사에 임명되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11세 귀성(貴省) 1670∼1699 [영양군방]
자는 일삼(日三), 호는 삼성재(三省齋). 병조참의 효인(孝仁)의 아들이다. 공은 천성이 순수하고 효성스러워 8, 9세에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를 알았고, 부모공양의 도를 실천했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였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 드리니 3일 동안 회생하였다. 어머니 환후에도 이렇게 하니 사람들이 듣고 천거하였다. 이 사실이 <동국삼강록(東國三綱錄)>과 <정읍읍지>에 실려 있다.
11세 영복(靈福) 1753∼1814 [영양군방]
자는 복삼(福三), 호는 남계(南溪). 석현(碩炫)의 아들이다. 학행이 높았으며 벼슬을 버리고 시문에 능통하여 문하생이 많았다. `남계선생'이라고 불려졌다.
12세 숙(橚) 1781∼1861 [영양군방]
자는 경경(慶卿). 증 호조참판 종희(宗禧)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라 행 칠곡부사를 역임하였다. 수직으로 가선대부에 올라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에 배수되고 증조부까지 3대에 걸쳐 증직 은전이 있었다.
13세 득회(得會) 1770∼1824 [영양군방]
자는 정보(正輔), 호는 석촌(石村), 시호는 희헌(僖憲). 동지중추부사 의중(義重)의 아들이다. 문과로 승헌대부 행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15세 사원(思元) 1848∼1921 [오산군방]
자는 영래(永來), 대군의 14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성익(成翼)의 현손이다. 1877년(고종 14)에 생원이 되어 학문에 정진하며 어려운 사람에게 많은 덕을 베풀었다.  1936년 6월 11일 회덕유림(懷德儒林)에서 발행한 <동헌비고(東獻備考)> `덕망(德望)'란에 `자는 영래이고 완산리씨 동지중추 성익의 현손으로 성품이 어질고 후덕한 마음으로 친목을 돈독히 하였음은 물론이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었고 걸인에게도 따뜻하게 대하였다. 아들 두규 역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덕을 베풀어 사람들이 효우(孝友)라고 칭송하였다.'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