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族譜=보첩)란 한 종족(宗族)의 계통을 부계(父系)중심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으로, 동일혈족(同一血族)의 원류를 밝히고, 선조의 행장(行狀), 업적(業績), 묘비명(墓碑銘) 등을 모아 정리하여 그 혈통을 존중하며 가통의 계승을 명예로 삼아 효의 근본을 이루고 종친과 가족의 화합을 위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한 나라에는 그 나라 국민들이 전개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 등의 활동을 기록한 국사(國史)가 있다. 마찬가지로 혈연을 중심으로 한 씨족 집단에는 그 씨족 구성원들이 대(代)를 이어 내려오면서 국가와 민족과 사회를 위하여 활동한 자취를 기록한 족보가 있는 것이다. 각 씨족을 합친 것이 국민이라 한다면, 각 씨족들의 족보를 합한 것이 바로 국사인 것이다.
족보(族譜)는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한 집안의 역사책으로서, 전 세계에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가치가 있는 우리 한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물이다. 여기에는 나의 성씨, 시조(始祖)로부터 나에 이르기까지의 역대 조상님에 대한 역사와 업적, 그리고 소중한 정신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옛날부터 한 집안의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해 온 것으로서, 이를 대할 때는 마치 살아 계신 부모님을 대하듯 상위에 모셔놓고 정화수를 떠놓은 뒤 절을 두 번 한 후에 경건한 마음으로 살펴보곤 하였던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소중하게 여겨온 족보는 해방 후 근·현대화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서양화, 핵가족이 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가족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지방에서 도시로, 권위주의에서 평등주의로, 특수주의에서 보편주의로, 비인격성에서 인격성으로의 변화 등이 그것이다. 이에 편승하여 족보라는 것을 마치 전근대적인 봉건사상의 대표적인 유물로서 청산 내지 타파되어야 할 대표적인 것으로까지 생각하는 일부 왜곡된 시대 분위기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혈족과 전통적 가족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해 온 민족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 정치, 사회, 문화, 사상, 문명 등이 변한다 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부자지간(父子之間)의 효(孝)정신이요, 형제간의 사랑이요, 혈족간의 애정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의 부모님과 조상에 대한 자랑과 긍지심이다. 또한 자신이 있기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문자로 정리하여 대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가승 또는 족보에 대한 높은 가치성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해야한다.
아직까지도 만약 자기 자신이 '근본이 없는 사람'으로 불려졌을 때는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그것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으로서, 예로부터 우리 조상님들이 족보를 왜 그렇게 소중히 여겼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족보는 '피의 기록이며 혈연의 역사'이다. 우리 조상님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지켜온 족보를 우리는 전 세계에서 우리만이 갖고 있는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여기고 우리 후손들에게 이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 할 정도로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외국에도 '족보학회'나, 심지어는 족보전문 도서관이 있는 곳이 있는 등 가계(家系)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우리처럼 각 가문마다 족보를 문헌으로까지 만들어 2천년 가까이 기록해 온 나라는 없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700여종에 18,000여권의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성씨 관계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 족보는 원래 중국의 6조(六朝)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었으며, 개인의 족보를 갖게 된것은 한(漢) 나라때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제도를 만들어 과거 응시생의 내력과 조상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이다. 특히 중국 북송(北宋)의 문장가인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에 의해서 편찬된 족보는 그후 모든 족보의 표본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의종(18대, 1146 ∼ 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다. 그러나『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관제(官制)로서도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보첩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보계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사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나, 1476년(조선 성종7년)의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라고 전하고 있다. 이후 1565년(조선 명종20년)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 때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