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께서는 덕망이 높고 문장이 뛰어나 신라 때 사공(司空)벼슬을 지내시고, 태종무열왕의 10세손이며 군윤(軍尹)벼슬을 하신 김은의(金殷義)의 따님 과 결혼하시어 대대로 신라에 벼슬을 하시다가, 6세의 휘자 긍휴(兢休)에 이르러 고려 사공(司空)이 되시었다. 시조의 18세(世)는 목조(穆祖)대왕이시니 휘(諱)는 안사(安社)이시다.
목조께서는 처음 전주의 호족(豪族)으로 살았다. 성격이 호방하고 용기와 지략이 남과 달랐다. 그러나 새로 부임해온 지주사(知州事)의 탐욕과 포악함을 규탄하니 보복하려 하므로 이를 피하여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하였으나, 그 지주사가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꺼려 다시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이주하셨다.
그러나 철령 이북은 원(元)의 영토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 소속되므로 목조께서 원나라 남경(南京) 5천호소(五千戶所)의 장관(다루하치)벼슬을 하셨다. 그리고 아들의 휘자 행리(行里) 익조(翼祖), 손자의 휘자 춘(椿) 도조(度祖), 증손의 휘자 자춘(子春) 환조(桓祖)가 모두 천호(千戶)의 벼슬을 세습하셨다.
21세(世) 환조(桓祖)는 공민왕 때 쌍성수복에 큰 공을 세워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고 영록대부판장작감사(榮 祿大夫判將作監事) 삭방도만호(朔方道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를 지내셨다.
환조께서 승하하신 후 고려조에서는 문하시중(門下侍中) 벼슬을 주었다. 환조의 아들이신 태조(太祖)께서 고려의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 민심을 수습하여 좌시중(左侍中) 배극렴 등의 추대를 받아 춘추 58세에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오르셨다.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했으며, 우리 전주이씨의 중시조이시다.
태조께서 등극하시어 위로 고조까지 추존하여 대왕으로 높임으로써, 시조(始祖)로부터 17세 장군공 양무(陽茂)까지는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하고, 목조(穆祖)부터 순종황제까지의 왕통계(王統系)는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고 한다. 그리고, 목조 5왕자로부터역대왕자(대군, 군)파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고 한다.
분파된 계통을 살펴보면 목조이전까지 갈라진 파로는 시조의 14世 궁진의 차남인 단신(端信)의 시중공파(侍中公派)와 15世 용부의 차남 거(琚)의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와 17世 장군공 양무 3남 영습(英襲)을 파조(派祖) 로 하는 주부동정파(主簿同正派) 등 3파가 있고, 목조, 익조, 도조, 환조 4대자손으로 18파가 있으며, 태조(太祖) 이후 장조(莊祖)의 3왕자군까지 모두 125파가 있었으나, 자손이 없는 왕자에 출계관계로 두 파가 한 파로 되는 경우가 있어 사실상 그 수는 줄어 현재는 105파로 분리되고 종약원에 등록된 파종회는 88개 파로 파악되고 있다.
본관(本貫)의 유래는 시조(始祖) 사공공(司空公)의 조경단(肇慶檀)과 경기전(慶基殿)이 전주(全州)에 있고, 시조로부터 18世인 목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전주의 호족으로 살았기 때문에 우리 본관을 완산(完山) 또는 전주(全州)로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