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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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원혁()작성일2025-12-06조회수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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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영대군 (1420~1469)
조선 시대 세종의 넷째 아들로 1420 년 태어나고 이름은 구 (璆 )이다. 1428 년 (세종 10) 대광보국 임영대군 (大匡輔國 臨瀛大君 )에 봉해졌으며, 1430 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439 년 여색에 빠졌다 하여 직첩 (職牒 )을 빼앗겼고, 그러나 세종의 총애를 받아 1442 년 원윤 (元尹 )이 되었으며, 1445 년에는 총통 (銃筒 ) 제작을 감독하였고, 2 년 후에는 종성지방의 경재소 (京在所 ) 일을 관장하였다. 1450 년 (문종 즉위년 )에 문종의 명을 받아 화차를 제작하였다. 세조가 정권을 잡자 그를 보좌하여 신임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활달하였고 무예와 의론 (議論 )에 뛰어났으며, 왕손이면서도 근검하였고 사람들을 대하는 데 교만하지 않았다. 아들로 주 (澍 )·준 (浚 )·순 (淳 )·정 (淨 )·징 (澄 )·함 (涵 )·인 (潾 )·탁 (濯 )·옥 (沃 ) 등을 두었다. 1469 년 사망하여 의왕시 내손동 산 154-1 에 묘가 안장되어 있다. 묘역은 3 단으로 상단에는 봉분과 비석이 있는데 봉분은 둘레가 1,650cm, 높이가 210cm 로 대형이다. 봉분주변의 호석은 1981 년에 새로 축조한 것으로 동서남북의 모서리에 대나무, 꽃, 새 등의 무늬를 새겨놓았다. 봉분의 동쪽에는 높이 200cm, 너비 50cm 의 비석이 있는데 앞면에 「조선국왕자임영대군정간공지묘 (朝鮮國王子臨瀛大君貞簡公之墓 )」 뒷면에는 「개국오백삼십삼년알봉곤돈병월일중건신좌 (開國五百三十三年閼逢困敦病月日重建辛坐 )」가 새겨져 있다. 중단에는 상석, 망주석 2 개, 장명 등이 있다. 원래의 상석은 없어지고 1981 년 새로 만든 이 상석은 140×90×45cm 의 크기이고, 비석은 너비 43cm, 높이 36cm 로 중간에 문고리 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숙종때 세웠다고 하는 장명등은 사방으로 4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하단에는 동서 양쪽에 높이 250cm 의 문신석인이 있는데, 얼굴이 새겨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두손을 모아쥐고 있는 홀도 선명하다. 임영대군의 신주를 모신 사당은 묘역에서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이다. 원래 사당의 위치는 마을에 있었으나 , 지금부터 약 180 년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제향은 음력으로 정월 21 일 낮 12 시에 행하며 전국에서 많은 후손들이 참여한다고 한다. 사당은 크지는 않지만 건물의 짜임새나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추어져 있다. 2.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가 졸하였다. 이구(李璆)는 자(字)가 헌지(獻之)이며, 세종(世宗)의 넷째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활달(豁達)하고, 물리(物理)에 정통하며, 무예(武藝)가 절륜(絶倫)한데다가, 또 문사(文史)를 섭렵(涉獵)해서 의논(議論)이 초월(超越)하여, 세조(世祖)가 일찍이 유자(儒者)의 풍도(風度)가 있다고 칭하였다. 함(涵) 이하는 측실(側室)의 소생이다. *. 참고문헌 조선왕조 실록 -. 예종실록 3권, 예종 1년 1월 21일 병자 2번째기사 1469년 *. 작성자(옮긴이)의 첨언 : 적자, 서자, 얼자 모두 자식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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