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HOME 열린마당 자유게시판
창동 시화 첩 '조귀'
작성자원혁(leewhhh@gmail.com)작성일2026-04-30조회수4
파일첨부

Ⅰ. 머리말 

 1927년 3월, 보령 출신 문인 창동 이승규(滄東 李昇圭, 1882~1954)가 조선총 독부 주최 학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 도쿄로 도일(渡日)하기에 앞서, 벗들과 함께 산벽루(珊壁樓)에서 전별 시회(詩會)를 열었다.

이 모임의 결실이 바로 『조 귀(棗龜)』 시서화 첩이다.

이 시첩은 문사(文士)와 서화가들, 근대 지식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시를 짓 고, 서첩을 이루고, 문인화와 기호적 그림까지 더해 만든 횡권(橫卷) 절첩 형식 의 합작품으로, 근대 한문 문단의 교유 방식과 시·서·화 일체(詩書畵一致)의 미 학이 집약된 귀중한 자료이다.

이 전별 시회에는 문학·예술·학문·교육계의 중심 인물들이 참여했다. 

중심에는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 승려로서 근대 불교학의 개척자・국학자・시인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 1870~1948), 근대 서 화계의 대부 해강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春 谷 高羲東, 1886~1965), 서화협회 회장을 지낸 명필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7) 등이 있었다.

또한 근대 서예가 석정 안종원(石丁 安鍾元, 1874~1951), 문사·문화운동가 우 하 민형식(又荷 閔衡植, 1875~1947), 서예가이자 문인화가 관재 이도영(貫齋 李 道榮, 1884~1933), 한학자이자 서화가 난타 이기(蘭坨 李琦, 1856~1935), 한문 학자 우당 윤희구(于堂 尹喜求, 1867~1926), 서화협회 특별회원 소관 정대현(素 觀 鄭大鉉), 교육자 학림 민창호(鶴林 閔昌鎬), 문사 진암 이보상(震庵 李甫相, 1882~1948), 그리고 벗 창동 이승규와 깊은 교유를 나눈 시인 성석 이응균(醒 石 李應均, 1883~?), 묵죽도를 그린 백순(白淳) 등이 참여하였다.

이처럼 『조귀』는, 전통 유학자와 근대 지식인, 서화가와 문인이 한 자리에 모 여, 송별의 정을 품고도 시대적 이상과 지적 열정을 나눈 기록이다.

또한 이는, 학문·언론·교육·예술을 넘나든 이승규 개인의 교유망과 문화운동을 생생히 보여 주는 1차 사료로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본고는 『조귀』 시화첩의 제작 배경과 참여자 구성, 시서화 작품의 내적 연관 구조와 양식적 특징을 분석하여, 근대 전환기 문인의 교유문화와 예술적 실천이 교차하는 지점을 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전통 문인문화가 단절되지 않고, 근대적 실험과 집단 창작을 통해 변용·확장되던 실제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창동(滄東) 이승규(李昇圭)의 생애와 활동 

창동 이승규(滄東 李昇圭, 1882~1954)는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시 루뫼]에서 태어난 조선 말기‧근대기의 대표적 한학자이자 교육자, 언론인, 그리 고 문화, 독립운동가였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字)는 윤약(允若), 호(號)는 창동(滄東) ‧간암(艮菴)‧남곡(藍谷) 등으로 불렸다.

임영대군 => 윤산군> 익주군 => 호남군 => 덕온 ...... 승규

 

그 중 ‘창동’이라는 호는 고향 보령의 바다와 산 천을 아우르는 정서적 기표로, 자연과 교유하며 살 았던 문인으로서의 품격을 잘 드러낸다.

려서부터 한학자인 부친 주계(珠溪) 이사욱(李 思彧)에게 한문과 한시를 익혔다.

이후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고, 이후 근대 사상과 교육의 세 계로 눈을 뜨면서도 유학자의 품격을 잃지 않았다. 한국 전통 지성과 서양 근대 지식을 아우른 균형 잡힌 사유는 그의 평생에 걸친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1910년 8월 한일병합 직후에는 만주 통화현으로 건너가 이동녕(李東寧), 김동삼(金東三), 이시영(李始榮), 양기탁(梁起鐸) 등 신민회(新民會) 인사들과 함 께 초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사관학교(신흥무관학교 전신) 설 립과 청년 개척 사업에 관여하며, 만주 지역에서 약 1년간 독립군 기지 조성에 힘썼다.

그러나 재정적 곤란 등으로 고향 주산으로 돌아왔고, 신민회가 추진하 던 민족 실력양성 운동의 일환으로 지역 유지들과 함께 1911년 5월 주산면 간 치에 사립 ‘옥성학교(玉成學校)’를 설립하였다.

성학교는 일제 식민 교육 정책에 맞선 항일 실력양성 운동의 현장이었으며, 산수·지리·역사·생물 등 근대 과목을 중심으로 교육하였다.

이승규와 그의 동생 이항규(李恒圭)를 비롯한 교사들은 “학문을 통한 구국(救國)”을 목표로 청소년 계몽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1918년 3월 폐교되었으며, 이후 지역사 회의 청원과 지원에 힘입어 1921년 공립 ‘주산보통학교’(현 주산초등학교)로 재 인가되었다.

이승규의 옥성학교 설립은 신민회 계열 교육운동사의 중요한 한 획 으로 평가된다.

그는 옥성학교 운영 이후 다시 상경하여 서울과 만주를 오가며 사립학교 교원 신분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논설반 기자로 입사 하여 항일계몽 논설과 한시(漢詩) 칼럼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언론 활동을 마친 뒤 교육자로서 그는 특히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교육관은 “옛것을 지켜 새것을 아우른다[守舊爲新]”는 태도로 요약되며, 전통 학문의 도 (道)를 근간으로 하되 실천과 계몽을 중시한 실용적 지식인이었다.

1920년 보성 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중학한문교본』과 『한문작문요결』 등 교재를 집필하였는데, 해방 이후 한문교과서의 근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21년에는 임경재·최두선·장지영·권덕규·신명균 등과 함께 ‘조선어연구회’를 설립하여, 한글 연구·보급과 민족어 자주성 회복에 앞장섰다.

이어 1922년 휘문 의숙(徽文義塾)으로 자리를 옮겨 한문·국어·역사 교육에 몰두하며 25년간 후진을 양성하였다.

1931년 천도교 총재와 교령을 역임하였고, 유림연합회 총재로도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는 500여 명의 문필가들과 함께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에 참여하여 일본군국주의에 유린된 민족문화를 복원하고자 하였으며, 1947년에는 ‘전국유교 연맹’ 부위원장으로서 사대 의타사상을 배제하고 자주독립 정신을 고취하였다.

1947년부터 6.25 발발 시기까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 1919년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아들 이철원(李哲源, 제2·4대 공보처장 역임)이 경찰의 추적을 받을 때, 중국 만주와 상해 임시정부 인사들과 연계하여 그의 망명을 도왔다.


일생을 민족운동과 후진 양성에 바친 그는 한시 평론 분야에서도 최고 평가를 받았으며, 다수의 저서와 비문을 남겼다. 1954년 3월 1일 향년 73세로 별세하여 증산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이승규는 일제강점기 동안 “교육·언론·저술·전통문학·문화운동”을 아우르는 근 대적 유학자이자 계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문필 활동을 통해 일제 통치를 정면 으로 비판하며, 『철인정다산전』·『영웅이충무전』·『방촌문집』 등 다수의 역사서와 계몽서를 저술하여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신문 지면에도 한시(漢詩)와 시화(詩 話)를 연재하여 전통 한문학의 미학을 대중에게 소개하였고, 조선어연구회 활동 을 통해 언어 자주성 회복에도 기여하였다. 

문인으로서도 그는 다작(多作)의 시와 시화를 남겼다.

『계원담총(桂園談叢)』, 『동양시학원류(東洋詩學源流)』, 『대동시화집성(大東詩話集成)』, 『계산시화(桂山 詩話)』, 『시단금설(詩壇金屑)』, 『일사시화(逸史詩話)』 등이 대표적이다.

개인 시 집 『간암만록(艮菴漫錄)』은 그의 한시 세계를 집약한 작품으로, 학문적 엄정 속 에서도 인간적 온기와 풍류를 잃지 않는 시풍을 보여준다.

그의 문학은 조선 후 기와 근대 초 한문학을 잇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

전통과 근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 그는, 문학·언론·교육·예술을 넘나든 지성 이었다.

서울에서 활동하였으나, 그의 사유와 정조에는 언제나 고향 보령의 산 수와 교유의 정이 깃들어 있었다. 


*. 시화첩의 구성과 제작 배경

『조귀』 시화첩은 1927년 3월 19일 창동 이승규(滄東 李昇圭)의 일본학사 시 찰단의 일원으로 참여할 때 도일(渡日)을 기념하여 제작된 합벽 형식의 시서화 첩이다.

가로 33.5cm×세로 24.5cm 크기의 8절지 지본절첩(紙本折帖)으로, 총 14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단 표지에는 석정 안종원(石丁 安鍾元)이 해서(楷書) 로 ‘조귀(棗龜)’라 제첨하고, ‘창동거사 장(滄東居士 藏) 석정 첨(石丁 簽)’이라는 장서식이 덧붙어 있다.

지(內紙)에는 서·화·시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표 1>에서 보듯 앞부분(1~7 면)은 위창 오세창, 관재 이도영, 난타 이기, 우하 민형식, 성당 김돈희 등 당대 대표 서화가들이 남긴 작품 7점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8~13면에는 석전 박한 영이 운자(韻字) ‘新·隣·春·頻·人’에 맞추어 먼저 읊은 칠언율시를 시작으로, 11 인의 문사가 순차적으로 차운(次韻)한 총 12수의 송별시가 자필로 실려 있다.


이 가운데 마지막 시는 송별의 주인공인 창동 이승규의 작품이다.

첩의 말미(14 면)에는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의 묵괴석(墨石圖)이 배치되어 예술적 완결성 을 더한다.

이 시서화 첩은 현재 수원박물관에 ‘이승규전별시화첩’(등록번호 2023-02-0004) 이라는 명제로 소장되어 있다.

조귀』 시화 첩의 제작에는 산벽시사(珊壁詩社)의 주요 동인들이 중심적 역할 을 하였다.


산벽시사는 1925년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우하 민형식(又荷 閔 衡植)·자천 서상춘(紫泉 徐相春)·석정 안종원(石丁 安鍾元)·관재 이도영(貫齋 李 道榮) 등 16인으로 결성된 근대 문인 시사로, 전통 시사 조직을 계승하면서도 서화 합벽도(書畵合璧圖)와 같은 문인-예술가 협업 형식을 통한 새로운 문예 운 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25년 3월부터 1927년 12월까지 약 230여 차례에 걸쳐 지속적이고 밀도 높은 집단 창작·교유 네트워크를 유지하였으며, 그 결실로 『산벽시사합벽 도(珊碧詩社合璧圖)』를 비롯한 다양한 시서화첩을 남겼다.


『조귀(棗龜)』라는 표제 는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벗의 무사귀환과 길상(吉 祥)을 기원하는 문인의 상 징적 명명(命名)이다. ‘조귀(棗龜)’는 글자 그대 로는 ‘대추 그리는 거북’ 을 뜻하지만, 그 속에는 음운적 언어유희가 숨어 있다.

 ‘조(棗)’는 ‘조(早, 일찍)’ 와 같은 소리를 가져 ‘조 속히’의 의미를 내포하고, 『조귀』 앞면, 수원박물관 『조귀』 뒷면, ‘귀(龜)’는 ‘돌아올 귀(歸)’와 같은 음을 지녀 ‘무사히 돌아오다’의 뜻을 상징한다.

따라서 ‘조귀’는 “조속히 돌아오라”, 곧 외유(外遊)에 나서는 벗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송별의 마음을 함축한 표제다.

이와 같은 음훈적 상징은 조선 문인들의 서화 합벽(合璧) 문화 속에서 자주 활용된 표현으로, 언어의 미감과 정서적 깊이를 동시에 드러낸다. 


정묘년(1927) 봄에 내가 학사(學事)를 시찰하려고 장차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자,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이 산벽루(珊壁樓)에서 한때의 명사들을 모아 각자 시문과 서화를 가지고 꾸며서 비단 첩을 만들어 전별 선물로 삼았으니, 대단히 성대한 일이었다[丁卯春, 余以學事視察,將渡日本,閔又荷衡植,會一時 名士于珊碧樓,各以詩文書畫, 粧成錦帖, 為余贈行,甚盛事也].” 이 기록은 산벽루가 산벽시사(珊壁詩社)의 주요 회합처이자 문예 활동의 중심 지였음을 보여준다. 『조귀(棗龜)』 시화첩은 바로 이 산벽시사 동인들의 깊은 교 유와 예술적 연대를 바탕으로 제작된 회심의 합작물이다. 단순한 송별 기념첩을 넘어, 전통 시서화 정신과 근대 문인예술의 협업 정신이 교차하는 집단 창작물 로서, 창작과 우정, 예술성과 시대정신이 한자리에 응축된 상징적 유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석전 박한영과 위창 오세창을 중심으로 한 산벽시사 동인들이 보령 출신 이승규를 위해 마련한 이 합벽(合璧) 시서화첩은, 시(詩)·서(書)·화(畵)가 조화롭 게 어우러진 문인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합벽’은 두 개의 반쪽 구슬을 하나 로 맞춘다는 뜻에서 비롯된 말로, 서로 다른 예술적 요소가 만나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비유한다.

『조귀』 시화첩은 근대 문인과 서화가들이 공동으로 완성한 대표적 집단 예술 (collective art)로서, 근대 한문학사·예술사·지역문화사 연구를 아우르는 귀중한 사료이자 문인 공동체의 미학과 정서를 온전히 전해주는 작품이다.


Ⅳ. 시화첩 작품 해설

 『조귀(棗龜)』의 면면(面面) 『조귀(棗龜)』는 전별의 자리를 매개로 문인들이 남긴 시(詩)·서(書)·화(畵)의 합일미(合一美)를 구현한 시서화첩이다.

각 면(面)은 제재와 서체, 화법, 운자 체 계와 상징망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촘촘히 구성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전통 문 인정신과 근대적 협업 미감이 맞닿는 지점을 드러낸다. 

4.1. 〈贈柳唱驪〉 –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書 贈柳唱驪 丁卯之花朝前夕送滄東仁兄游東瀛 葦滄 버들이 이별노래를 불러 주다 정묘년(丁卯年, 1927) 화조(花朝, 음력 2월 15일)를 하루 앞둔 저녁, 창동 인형께서 일본으로 유람을 떠나심을 전송하며 위창 오세창이 쓰다.

...... 


본 홈 페이지 구성상 작품을 수록하기가 어려워....

바로 아래 주소를 클릭 하시면 각각의 작품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덕온가문산책' 블로그로 연결되며 12수의 명작을 감상하십시오.

https://cafe.naver.com/guchon/131

감사 합니다.

이전글
다음글 임영장학회 장학금 운영 관련 문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