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대군 차남 귀성군 축출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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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원혁()작성일2023-12-01조회수5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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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구)성군 이준(1441~1479)은 임영대군(세종 4남)의 둘째 아들로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세조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으며 이시애의 난이 발생하자 사도병마도총사로 임명했다. 이준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영의정으로 특서되었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 구공신과 신공신의 권력투쟁! 세조(수양대군)가 일으킨 계유정난(1453년)이란 쿠테타는 거대한 공신 집단을 형성한다.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 등 공신들은 어떠한 죄를 지어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 특권 위에 모든 정치, 경제적 권력을 장악했다. 한편 세조는 구공신 한명회와 신공신 이준을 대립시켜 왕권 강화를 꾀했다. 구공신은 한명회, 정인지, 신숙주, 권람 등이 핵심이고, 신공신은 귀성군 이준, 영순군 이부(세종 5남 광평대군 아들) 등 세조의 조카들이 핵심이었다. 신공신들 대부분은 왕실의 일가 또는 왕실 외척들이었으니 더욱 신경이 쓰였다. 세조가 왕위에 있을 때는 상호 견제가 되어 겉으로 갈등이 없는 것 같았으며 세조는 귀성군 이준을 크게 높여 대우를 했기 때문에 한명회를 비롯한 구공신들은 위기를 느낄만 했다. 그러나 세조가 죽고 그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상황이 급변했다. 예종은 만 열여덜 살에 즉위 했지만 구공신은 물론 신공신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예종과 공신들 사이에 긴장감이 돌았다. 한명회의 구공신 세력은 ‘이준은 종친이니 금위(임금 호위부대)의 군사를 맡겨서는 안 되고 .... 예종는 그날로 하지시켰다’ 신공신들의 몰락의 시작이다. 예종은 공신세력을 제거해 왕권을 강화 하려한 것이다. 그러나 이준을 비롯한 신공신들은 제거되었으나 세조의 쿠테타 세력 한 집단이던 한명회, 신숙주 등의 구공신과는 충돌이 계속 발생 되었다. 그런데 예종은 즉위 1년 2개월만인 1469년 11월 28일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하루 전날에도 정상적인 국정을 처리했던 사람이 석연치 않게 죽음이었다. 여하튼 정희왕후(세조 부인)가 수렴청정(섭정) 하기로 하고 다음 왕은 성종(자을산군)이 선택되어 13세의 나이에 제 9대 왕위에 오른다. 세조와 예종이 죽자 귀성군 이준은 위협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어린 성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간주되고 섭정을 하고 있던 정희왕후와 구공신들 역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를 몹시 경계했다. *. 귀성군을 역모로 몰기 위한 작전 시행! 성종 1년, 구공신의 일원인 생원 김윤생은 7품에 불과한 전 직장 최세호가 역모의 주범인 것처럼 끌어들였다. 최세호는 임영대군 부인의 친족이었다. “귀성군은 왕손이 아닌가? 그리고 건장하고 또 지혜가 있으니 신기(왕위)를 주관할만한 사람이다. 지금 어린 임금을 세웠으니 나라의 복은 아니다. 어째서 왕위를 잘못 정했을까? 내가 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는 이 말을 들었지만 입을 닫고, 닫고, 닫도 또 닫고 닫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 성종실록 1년 1월2일 보고를 받은 성종과 한명회는 즉시 최세호를 국문하였다. 최세호는 혹독한 형벌을 견뎌내면서 혐의를 부인하는 바람에 귀성군 이준 제거 계획에 착오가 발생했다. 이준은 최세호 등과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귀성군 이준 제거 작전에 차질이 생긴 구공신들은 다음 단계로 권맹희를 먼저 잡기로 작전을 수정한다. 여기에 신숙주는 “이준이 세조 때도 나인과 통정헀으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면서 처벌을 주장했다. 이준이 비록 작은 공이 있지만 돌볼 것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선왕 때의 죄를 다스려서 폐하여 서인으로 삼아 외방으로 유배시키소서. 이것은 사실 그를 보전하려는 것입니다.“ –성종실록 1년1월13일 그러나 정희왕후는 귀성군 이준 처리 문제는 쉽지 않았다. 세종이 사랑했던 임영대군의 아들이며, 세조도 무척 아끼던 조카(종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창손 등 구공신들이 합동으로 가세하여 귀성군 이준을 제거하는 거사날(1월13일)로 정하고 상소를 올려 귀성군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정희왕후는 공신들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구공신들은 귀성군 이준 처리 방침을 문서로 작성했다. ”이준은 공신 명부에서 삭제하고 직첩(벼슬 임명장)을 회수하며 경상도 영해에 안치하고 가산을 적몰한다.“ 정희왕후는 ’적몰 가산‘이란 글을 지워 재산은 빼앗지 않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렇게 귀성군 이준은 구공신들에 의해 1470년 1월 조정에서 쫓겨났다. 최세호는 이것이 모두 귀성군 이준을 제거하기 위한 구공신들의 잘 짜여진 각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각본의 총지휘자는 예종과 성종의 장인이며 정희왕후와 결탁한 당대 최고의 권력자 한명회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최세호는 구공신들의 음모에 대해 경고하였으나 경고에 무너질 세력이 아니였고 오히려 능지처참되고 집안이 멸족되고 말았다. 세조가 말년에 구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한 신공신들은 예종과 성종 때 쑥대밭이 되었다. 아무 죄도 없이 서인으로 강등된 귀성군은 유배지인 경상도 영덕 영해에서 울분에 찬 채 10년을 지내다가 1479년 1월 39세 나이로 죽었다. 승정원에서 전교하기를 ”이준이 죽었으므로 족친을 시켜 가서 장사하게 하고 또 그 처자를 놓아 보내려 하니,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오산군(귀성군 형) 이주가 와서 아뢰기를 ”이준의 주검을 광주에 묻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승지들이 아뢰기를 ”이준은 죄가 커서 살아 있을 때에 이미 먼 지방에 귀양 갔으므로 경성 곁에 묻을 수 없으니 그대로 적소에 묻는 것이 편리합니다.“ 전교하기를 ”경 등의 말이 참으로 옳다“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10(1479)년2월2일 후사는 없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박영규 저) . 조선왕조실록(이덕일 저) . 네이버, 다음, 구글 . 성종실록, 세조신록(조선왕조실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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